교회소식 "회복의 강물,성령의 바람"
요엘 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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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 11:19

3월 15일 주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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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정보 2020-03-15

2020년 3월 15일 주일예배
본문 : 욥기 1장 13~22절
제목 : 위기의 때에 드러나는 신앙의 현주소
찬양 : 585장(구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오직 주만이

 

<코스코에서 경험한 일>


지난 금요일, 생필품을 사기 위해 코스코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코스코에 가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코스코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입구에 죽 늘어서 있던 카트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에다 짐을 싣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카트 좀 주세요!’ 그래서 카트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코스코 안에 들어가서는 더 치열하고 복잡했습니다. 그 날 저와 아내가 구입하려고 했던 것은 생활에 꼭 필요한 쌀, 휴지 같은 물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쌀이나 휴지를 전시해 둔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원했던 물품들은 사지 못하고, 계획에 없던 츄로스, 피자만 한 쪽씩 사 먹고 왔습니다.

평상시에는 항상 가득히 쌓여 있던 쌀, 휴지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물품들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그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의 상황이 오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구나!’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물품들이 무엇입니까? 기본 식량입니다. 쌀, 밀가루, 물, 휴지.. 그리고 지금처럼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상황에서는 마스크, 세니타이저, 소독제와 같은 물품들이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한 두달 전만 해도, 약국에 가면 널려 있는 것이 마스크였고, 세니타이저 였습니다. 코스코나 H-mart에 가면 10불도 안되는 쌀 부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품귀 현상이 일어나 웬만한 사람들은 돈을 주어도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WHO(세계 보건기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팬더믹(전세계 대유행)으로 선언했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확진자와 사망자가 점점 늘어나지만, 아직까지는 백신도 개발되지 않았고, 검사나 치료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주가는 폭락하고, 공립학교와 대학교들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집 안에서만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필품들을 집 안에 쌓아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말하는대로, 6피트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키고, 손 발을 잘 씻으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집 안에 생필품들을 가득 쌓아두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하게 안전할까요? 손발을 잘 씻고,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우리의 안전은 완벽히 보장되는 것입니까? 

적어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안전과 보호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독감 때문에 죽고, 암에 걸려 죽고, 총기 사고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지금 문을 걸어 잠그고, 생필품을 준비하고, 개인 위생을 청결하게 하는 것, 중요합니다. 코로나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안전, 참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 알게 되는 진실, 누구를 의지하는가?>


평범하고 안전이 보장되는 일상 생활 속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알게 되는 진실이 있습니다. 깨닫게 되는 나의 현주소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고 위협하는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이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 역대하 말씀을 통하여 여호사밧 왕의 모습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자기 자신과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 앞에서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들어 봅시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여호사밧은 위기의 상황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호사밧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했던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상 28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는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후였는데, 이웃 나라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 때, 사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사무엘의 영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사울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사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의지하기 위해, 인간의 방법, 주술, 무당, 점치는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극과 극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 외에도 이스라엘 왕들 중에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여 멸망한 여러 왕들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8번째 왕이었던 아하시야는 자신의 몸에 병이 찾아왔을 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왕하 1:3~4)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고 도움을 청하느냐?고 호통을 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믿음과는 다른 행동과 선택>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신, 다른 능력을 구하고 의지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눈 앞에 펼쳐진 상황과 세상이 돌아가는 현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맞다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그 믿음대로 실천하고 행동하지 못합니다. 불안한 마음, 걱정의 마음이 자꾸 나를 짓눌러 오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당장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힘과 그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하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새로운 교회의 청빙을 받고, 학생 비자를 종교 비자로 갱신하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저는 저의 기대와는 달리, 학생 비자도 취소되고, 종교 비자 발급도 거부되는 황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당연히 발급될 것이라 생각했던 종교 비자가 거부되어,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을 때, 저의 마음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을 때, 대학 시절 저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께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직원을 잘 알고 있는데, 내가 한 번 부탁을 해 볼까?’ 그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저는 교수님이 꼭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3~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의지하고 바랄 대상은 사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닙니다. 넉넉히 쌓아 둔 생필품도 아니고, 바이러스가 어디까지 번지고 있는지, 정확한 자료나 데이터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위기의 때에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 무엇에 소망을 두고 있느냐?” 오늘 여러분의 소망과 의지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까?  

 

<욥의 모범, 예배의 습관>


오늘 본문에 등장한 욥의 모습은, 위기의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욥이 당한 환란과 어려움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소와 양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모든 종들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래도 감당할 수 있겠는데, 같은 날,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욥이 얼마나 큰 고통과 상실감을 느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막내 딸 아비가일이 큰 사고를 당할 뻔 한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큰 저택에 구경을 갔는데, 그 곳에는 높은 계단이 있었습니다. 계단은 경사가 급하고 길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다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철없이 계단을 막 뛰어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아비가일에게 “계단에서 뛰지 말라!”고 고함 고함을 질렀는데, 이 딸내미가 아빠 말을 못들었는지, 계속 계단을 뛰어 내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죽 미끄러져서 난간 너머로 떨어질 뻔 했습니다. 깜짝 놀란 제가 급히 달려가 몸을 던져서 아비가일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잠에서 깼습니다.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한 지, 꿈에서 깼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는 아비가일 방에 가서, 이 아이가 무사한지 살펴보고,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꿈 속에서 아이가 다치거나 상하는 것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없는데, 실제로 자녀들의 죽음을 목격한 욥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10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하루 아침에 다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욥의 고통은 얼마나 심했을까요?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욥 2:9)라고 말했는데, 그 마음이 어떠한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생 일대의 위기 상황 앞에서, 욥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의 첫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 20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하나님 앞에 예배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욥은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울고 불고, 저주하고 원망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냐?’고 그렇게 원통해 하면서 절망 속에 빠져 있었을텐데, 욥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하나님 앞에 예배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계산된 반응이 아닙니다. “내가 성경에 기록될 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예배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의 의지나 계산을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본능적으로 일어난 반응입니다.

어떻게 예배가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예배가 그의 삶 속에 깊이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배는 욥에게 뿌리 깊은 습관이었습니다. 

 

<예배가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요.>


욥기 1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마지막 말씀에 주목하십시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은 항상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며, 혹시 마음으로라도 죄를 지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늘 예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욥은 언제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기쁘고 감사한 때에도 예배할 수 있었지만, 말할 수 없는 절망의 때에도, 고통과 괴로움의 순간에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욥의 모습을 통해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호흡처럼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습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를 통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며, 우리가 항상 드리는 예배에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25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은 함께 모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10명 이하로 모일 때에도 6피트 이상의 거리 간격을 유지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여, 지금 우리 성도들 중 많은 분들은 방송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집에서 드릴 수도 있고, 학교에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경건한 마음으로 복장을 갖추고, 마음을 다해 예배에 동참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그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 때문에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포기해 버리는 성도들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선 순위 중에 한참 저 뒤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내 일상의 필요들을 다 채우고 난 다음, 여유가 있으면 드려도 되고, 여유가 없으면 안 드려도 되는 그런 것으로 예배가 취급될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것을 핑계로 삼아, 주일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 폰으로 이런 저런 뉴스를 검색하다가, 마지 못해 짤막한 성경 구절 하나 읽고, 5분 메세지 하나 듣고, 그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스스로 합리화 하고 넘어가는 성도들이 있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려야 할 모습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라는 것입니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합니다. 예배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보물이기에, 어렵고 힘든 순간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구하며 찾는, 나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보리 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불꽃같은 눈으로 온 땅을 살펴보시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눈에 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욥과 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습관을 가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요.>


또 하나, 우리가 욥의 모습을 통하여 배워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욥의 고백을 한 번 들어 보십시요.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욥의 예배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져가셨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왜 불평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 자녀들 얼굴의 미소를, 자녀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는데, 얼마나 큰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자신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기에, 주신 자가 다시 취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그렇게 취하신 자가 다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맞아,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지,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업이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고객들과 손님들이 얼마나 더 줄어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고, 한 두주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말해 주면 좋겠는데, 어느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 장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 힘들어 질 것 같은 불안한 기운만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욥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주셨기에 또한 거두어 가실 수도 있음을 믿습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현실이 내 마음과 내 뜻대로 변화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요. 어떤 형편 속에서도 감사하십시요.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고백을 받기 원하십니다. 잘되고 흥할 때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안되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다 살펴 보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절망과 위기만 가득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의 끝에서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 이런 위기와 어려움을 겪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분을 붙들고, 이 어려움을 잘 이겨 내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요.>


말씀을 마무리하며 저는 그런 소망을 가져 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성도들을 만나도 반갑게 악수하고 껴안을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같이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손을 붙들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 훈련하고 교육하는 것,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재앙을 만난 것처럼 고통스럽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시간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진정한 감사를 회복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로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껴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함께 밥을 먹고, 매주 서로 만나 말씀으로 훈련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이며 감사의 제목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나 큰 은혜와 선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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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주보 [08.28.22] 2022년 8월 마지막주 주보소식 file 2022-08-28
535 주보 [08.21.22] 2022년 8월 넷째주 주보소식 file 2022-08-21
534 알림 [08.21.22] 2022년 8월 넷째주 가정예배지 file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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